
ㅡ For H.
눈을 떴다.
반쯤 젖혀진 커튼 사이로 들어온 한낮의 나른한 햇살이 방 안을 따스하게 훑었다. 붉은 카펫, 헤이즐넛 색 소파, 탁자 위 노트북과 보고서와 한 모금 마신 커피 잔. 그리고 셜록 홈즈.
길게 늘어져 있다가, 감은 눈을 반쯤 떠 햇살이 들어오는 창살을 바라본다. 삼십사 초 정도 그러고 있던 에메랄드 색 눈은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와 반대쪽 소파며 테이블 위 물건들, 공중에서 하늘거리는 먼지 입자들을 하나씩 훑다가, 마지막으로 입술 위에 대고 있었던 자신의 손끝에 가 멈추었다.
시계를 볼 필요도 없이,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진 정도를 보니 오후 네 시, 우편배달부가 베이커 가를 들를 시각. 창 밖에서 들리는 우편 배송용 차량의 엔진 배기음을 듣고 나서는 그럼 그렇지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짧은 낮잠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자가 객관화라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영국, 아니 유럽 최고의 탐정이 추리의 대상으로 삼는 건 의뢰인들뿐만 아니라 그 본인도 포함했으니까.
「 이리저리 흩어진 책과 종이 뭉치. 반쯤 빼어 둔 의자. 마시다 만 위스키와 먼지가 쌓인 책장. 청소를 그리 깔끔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그보다는 구태여 불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으려 하는 성격이라고 보는 게 옳다. 어차피 따로 정리해 두지 않아도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눈을 감고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으니까. 맞지 않는 사람과 사느니 차라리 일과 결혼하기를 택한 영국 국적의 XY염색체이자 자문 탐정이라는 직업을 만들어 낸 고기능 소시오패스. 」 그가 자신을 객관화하는 정도는 딱 그 정도. 더 하라면 할 수는 있겠지만 의미 없는 사실의 나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얼마 전 그는 자가 객관화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조현병 초기 증상을 보임. 환영, 환청 – 대상은 한 가지로 고정. ‘짐 모리어티’ 」
“안녕, 자기.”
그래, 바로 저런 거.
눈앞의 대상을 에메랄드 빛 눈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었다. 구김 없는 흰 셔츠, 검은 넥타이에 검은 코트 차림인 그는 죽은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이다. 언제라도 총기를 들 수 있는 손과, 언제라도 독설을 뱉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도톰한 입술. 아무렇지도 않게 천진한 웃음을 지어서 보는 사람 속을 뒤집는 데 일가견이 있는 멀끔한 얼굴.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긴 머리, 뒤통수에는 총구가 불을 뿜어 만든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을 테지. 그 모든 것을 셜록은 하나하나 뜯어내듯이 관찰했다. 그 시선의 진한 농도를 고려한다면 ‘훑었다’보다는 ‘핥았다’는 생각이 더 맞을 듯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오늘도, 그가 저기에 있었다. 짐 모리어티가.
“으음. 심심해 보이네.”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꽤 재미있었어.”
“거짓말. 할 일이 없어서 낮잠이나 퍼 자고 있었잖아?”
“…….”
대답하지 않았더니 그는 똑같이 소파 위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몸을 굽혀 셜록의 위로 바짝 들이대고는, 귓가에 속삭인다.
“친애하는 벗 존이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못한다니까 너는. 너와 내가 친구가 되었다면 참 괜찮았을 텐데, 어쩌다 우린 이런 결말을 맞은 거지? 아쉬워. 진짜 아쉬워.”
셜록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한 그 눈에서 뱀을 본다. 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이랬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셜록은 그 자신을 본다. 차라리 일과 결혼하기를 택한 XY 염색체이자 또 하나의 고기능 소시오패스가 거기 있었다. 자문 탐정과 자문 범죄자는 어쩌면 서로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의 근원이 여기 있다. 단 하나 부족한 틈을 서로의 존재로 채워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 서로의 존재가 누구보다도 절실하기에,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아이러니. 너는, 어째서 죽었는데도 내 앞에 다시 나타나는 거지?
입술이 말라가는 걸 느낀다. 혀끝에서 맴도는 단어를 뱉어내기가 힘이 들었다.
“네가 자문 범죄자이기 때문이겠지.”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은 집어치워. 그러는 넌? 이 세상의 모든 범죄자들 입장에서는 너만큼 골칫덩이인 존재가 또 없다고. 언제 적 선악의 기준을 들이미는 거야?”
“그래도―”
크게 숨을 들이킨다. 이 부분에 대해 논하자면 밑도 끝도 없는 수렁에 빠져들 것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저쪽 역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궤변이 우세해 보이는 것은, 논쟁의 규칙을 마음대로 비꼬고 비틀고 결국 자기 것인 ‘척’ 함으로써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궤변이라는 것의 파괴적인 본성 때문이지 결코 그의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모리어티가 히죽 웃었다.
“사실 다 의미 없지. 내가 궁금했던 건 하나야. 왜, 나는 안 되고 존 왓슨은 되는지.”
자기야, 대답할 수 있어? 모리어티가 주변을 맴돌며 물었다. 그는 네가 매번 말하는, 금붕어들과 다를 것 없는 족속 중 하나일 뿐이라고. 그럴 바에야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나을 텐데. 아니야? 대체 그 새끼가 나보다 잘난 게 뭔데―!
“없지.”
“내 말을 이해를 못 하나 본데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
모리어티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스친다. 몇 번 이렇게 모리어티를 마주하는 게 그리 싫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표정을 보는 게 꽤나 즐거워서.’ 셜록은 빙그레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조금 더 즐겨 볼까.
“내가 모르겠는 건 몇 가지 안 되는데, 그래서 그러나 보군.”
“자기, 지금 장난해? 그럼 나는 네가 알고 있는 흔해빠진 것들이라는 거야? 존 왓슨은 네가 모르는 거라서 그렇게 곁에 못 둬서 안달이고?”
“그렇다니까. 아직까지 그걸 못 알아챈 게 놀랍군. 방금은 좀 신선했어.”
모리어티의 한껏 치켜올라간 눈썹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셜록은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로 그에게 제대로 카운터를 먹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저도 모르게 슬 웃음이 새어 나온다. 글쎄, 모든 걸 아는 척 구는 네가 과연 이것까지도 알고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지금부터 떠올리는 일련의 나날들은 모두 네 죽음 이후에 벌어진 일인데.
“그리고 한 가지 더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존 왓슨뿐만이 아니야.”
“뭐?”
“존 왓슨뿐만이 아니라고.”
“……허! 다른 누가 더 있다고? 말해 봐, 누구야? 경감? 집주인? 존의 아내? 누구냐고―!”
숫제 이제는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드는 그에게 셜록은 그저 미소로 응수할 뿐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열이 오르는 건지 모리어티는 방 안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흩어 놓고, 책장의 책을 다 뽑아 놓고, 실험기구들을 박살낸다. 물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그가 있던 곳을 바라보면 멀쩡해져 있다. 현실은 역시 한낱 환상 따위에게 쉽게 침범당할 만한 곳은 아니지.
“ … H.”
“으응?"
“H, 라고만 해 두지. 네가 모르는 내 주변의 또 다른 사람. 협박도 할 수 없을 걸, 네 영향권의 밖에 있는 사람이거든. 물론 협박할 수 있다면 칭찬해주지. 하지만…”
해리엇, 당신이 순순히 그렇게 되도록 놔둘까? 셜록은 방금 생각해 낸 또 하나의 이름을 천천히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베이커 가 221A에 사는 나의 이웃. 당신을 어떻게 객관화해야 할까―
커피를 달고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게 일상인 해커. 자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듣고 …… 요즘은 더 무리하는 것 같던데 걱정이군. 인터넷 케이블 하나만으로 이웃의 노트북 방화벽을 뚫은 것부터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한 달간 지내 본 결과로는 그 이상이었다. 어린 사람답지 않게 삶에 짓눌려 있는 듯한 모습도 안쓰럽고,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일에는 눈을 빛내는 게 참 신기한 사람. 수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문을 두드려 안부 인사 정도는 하고 가는 게 일상이 되게 만들어 준 해리엇, 당신이라는 사람도 어쩌면.
“… 존과 같은 친구 아닐까?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점이 같으니까.”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모리어티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다. 눈알을 한 바퀴 굴리고 나서 한껏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뱉었다.
“기분이 젠장, 어떻게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나빠졌어. 이만 가야겠다고, 짜증나는 홈즈.”
“그래, 잘 가고 기왕이면 영영 내게서 좀 꺼지지 그래. 네가 보일 때마다 니코틴 패치를 평소보다 더 많이 쓰게 된다고.”
잘 가라는 의미로 손까지 휘휘 젓자 모리어티가 문으로 나서다 말고 뒤로 돌았다. 팔짱을 끼고선 새침하게 내뱉는 폼이 마치 뭐랄까 ……
“ … 꼭 한 마디를 더 하게 한다니까요. 그거 알아 셜록? 내가 가고 말고는 전적으로 네 선택이라는 거. 네가 날 보고 싶어서 부른 거고, 내가 없기를 바라면 가는 거고 뭐 그런 거야. 알잖아, 너와 나는 사실 같은 사람이라는 거…… 어떻게 해야 네가 이걸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키스라도 해 주랴? 혀라도 섞고 몸이라도 섞어야 알아채겠니?”
…… 짝사랑 하는 상대에게 못되게 구는 어린아이 같다고 하려고 했는데, 취소다. 정정. 모리어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짜증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 언젠가 해리엇에게 말했던 것처럼, 돌발 행동을 해서 저를 당황하게 만들려는 생각을 저쪽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자기가 당하는 입장이 되니까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워졌다. 니코틴, 니코틴 패치가 어디 있더라.
“제발 좀 꺼져!”
흥, 모리어티는 콧방귀를 끼더니 문을 열고 쾅 소리나게 닫았다. 방 안은 예전과 한 치의 다름도 없다. 먼지가 조금 쌓인 책장, 마시다 남은 위스키와 커피 잔이 올려진 테이블. 원하는 내용을 찾으려면 한참 걸릴 듯한 종이 뭉치와 책 더미. 아까보다는 길어진 그림자로 보아 지금은 오후 다섯 시.
221A 방향을 바라보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저녁은 먹었으려나. 설마 밤을 새려는 생각으로 컴퓨터 앞에 인스턴트 음식 같은 걸 잔뜩 쌓아다 놓은 거라면, 끌고 나와서 제대로 된 식사를 먹여주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며, 셜록은 방문을 나섰다.
ㅡ From Sherlock Holmes. Written by MsB.